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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나의 문화생활

영화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by 중(中)생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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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포스

 

지인이 흥미롭게 보고 왔다고 해 관람하게 된 <괴물>. 아무 정보 없이 극장을 갔다 도 당했다. 재미있는 스토리는 아니지만 2023년도에, 아니, 최근 5년 내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인 것 같다. 개봉한 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입소문을 타고 있는지 자주는 아니지만 아직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감독은 같은 사건을 사오리, 호리선생, 미나토의 시선으로 다르게 풀어낸다. 사건은 동시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차이가 발생한다. 세 명의 시선에서 관객에게 누가 괴물인지 끝없이 질문하게 한다. 

참고로, 건물의 화재와 트럼펫의 소리는 각 캐릭터의 시간 속에서 사건의 시간대를 알려주는 지표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영화를 본다면 사건이 맞물리는 지점을 이해하기에 훨씬 쉬울 것이다.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앞서 본 사건들이 뒤집히고 사건은 휘몰아쳐 정신없이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엔딩을 다시 곱씹어 보기 위해 2회차 관람을 하였고 첫 관람만큼 서프라이즈 포인트는 없으나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부분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너무 많으나, 오늘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만 해볼까 한다. 생각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이 부분이 싫은 사람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읽는 것을 추천한다.  

 

 


괴물은 평범함이 무엇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동시에 '평범'하다면 '행복'한가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한다.

사오리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미나토를 키우는 싱글 맘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그 어떤 어머니하고 다르지 않지만, 주변의 시선은, 아니 본인 스스로 또한, '평범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속의 불균형 때문일까, 사오리가 바라보는 미나토의 세상은 약간의 억울함이 묻어있다. 

 

미나토의 일로 학교를 방문하자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는 이럴 수 있다는 둥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똑같은 문제를 겪으면 나오지 않을 의문과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를 묻는다면 아니다. 사오리가 미나토에게 주는 사랑의 양에서 아빠의 빈자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든 한부모 가정이 부족함 없이 사랑을 주는지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요리의 아빠는 사랑보다는 공포감으로 본인의 자식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규모의 가족도 이렇게 다를 수 있는데 '평범한 가족'이라는 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사오리는 무의식적으로 '평범한 가족'이라는 기준에 미나토가 들어가길 바란다. 그녀가 계속 말하는 선은 알게 모르게 평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오리는 그녀의 가정이 일반적이지 않고 어딘가 어긋나 있고 부득이하게 힘듦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여 미나토는 본인보다 더 편히 살기 원한 것이 아닐까. 미나토가 편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평범한 가정' '선 밖으로 나서면 지옥'을 말하였겠지만, 막상 이러한 말들이 미나토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에 '평범'을 원하는 사오리에게 미나토는 요리에 향한 마음을 깨닫자, 사오리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어른들에게 솔직하게 말 못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흰 선 밖으로 나가지마. 선 밖으로 나서면 지옥이야"

 

그렇기에 영화의 초반부에 두 번 나오는 위 대사는, 어쩌면 평범하고 비슷하길 요구하는 우리 사회를 비꼬는 대사처럼 와닿는다. 사회에서 정의하는 평범은 다수가 해당하는 것으로, 다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소수가 잘못되었거나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오리는 평범의 관점에서 미나토를 불쌍하게 바라보았지만, 미나토는 불쌍하지 않다. 미나토는 그 누구보다 사랑을 받고 자랐고, 남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후반에 교장이 말하듯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악역처럼 표현되던 교장이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교장을 통해 미나토는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마음속 깊숙이 있던 이야기를 표출한다. 그 아우성을 계기로 영화는 클라이스로 향하며 끝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해질 수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일이라면 후~ 불어"

 

 

 

감독은 그 누구도 괴물은 아니지만 동시에 그 누구나 괴물이라고 말한다.

"괴물은 누구게?"라며 두 소년은 괴물 찾기 게임을 한다. 하지만 이 게임을 통해 관객에게도 영화 속 괴물을 찾게 한다. 감독은 연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괴물에 대한 힌트를 흘리고 영화의 시점이 바뀌며 관객은 괴물이 누구인지 끝없이 질문하게 된다. 영화의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괴물이라고 깨닫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괴물을 찾아내고 괴물을 단정해 버리려고 한 관객을 나무라는 듯하다. 괴물이라고 판단하려는 순간 다른 시점을 빌려 괴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장면을 통해, 괴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편견이 만들어 내는 것일 수 있다는 제안을 한다. 

 

첫 시점에서 사오리는 본인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듯한 정황을 발견하자 망설임 없이 학교로 갔고 교장과 대담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호리 선생은 본인의 아이를 괴롭힌 괴물로 표현된다. 시점은 호리 선생으로 넘어가 본인의 억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학교의 사정으로 본인을 변호할 기회조차 없이 학교에서, 사회적으로 내몰렸다.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각자의 시선에서 사건을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려고 했지만, 분명히 어긋난 지점들이 있다. 올바르다고 생각한 행동이,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 냈고 본인 스스로 또한 괴물이 되어있다. 

 

그래서 마지막 미나토와, 그리고 일부 요리의, 시선이 너무 안타까웠다. 속상했다.

다른 방식으로 평범을 요구한 미나토의 엄마 그리고 요리의 아빠. 세상의 상처 속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어린 나이에 너무 철이 들어버렸다. 그 어떤 어른에게도 본인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서로뿐. 그래서 둘이 공유하는 세상은 어른들의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괴리감이 너무 커 다른 행성의 사람처럼 느껴진다. 엔딩은 괴물 전체 그 어떠한 장면보다 동화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표현되는 그 장면이 그 어떤 장면보다도 더 슬프다. 

 

아직 철없어 놀아야 하는 나이에 어른들이 준 상처로 인해 너무나도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 하지만 여전히 어린애들. 어른들의 말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아이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기에 작은 것에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행복은 멀리 있기도 하면서 가까이 있다. 최소한 편견으로 인해 남을 괴물로 만들지 말고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은 필요하다고 보인다. 


 

 

다양한 사회의 문제와 소수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세 명의 인물을 통해 나열해 내는 감독의 연출과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한 가지 사회 문제를 집어내기도 쉽지가 않은데 여러 가지 문제들을 물 흐르듯이 영화 한 편에 담아냈다. 그래서 괴물을 처음 관람하면 충격이 가장 크고 한 번 더 보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다가온다. 

 

이 외에도 장면 장면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 글의 구성도 바꿔가며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다 풀어볼지 하였지만, 결국 가장 크게 남은 이야기 두 가지만 남기고 글을 줄였다. 못다 한 말들이 많지만, 다시 관람할 그날을 기대하며 아쉽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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